석가지운(釋迦之運) 3천 년, 미륵지운(彌勒之運) 5만 년
간단하게 얘기해서 구천상제님께서는
절과 연관해서 강세하셨다.
금산사에 임어하셨다.
불교에서는 결혼을 하면 안 된다.
선지조화(仙之造化),
불지형체(佛之形體),
유지범절(儒之凡節)이라 하지 않았느냐.01
불지형체(佛之形體)이니 불교란 것은
쉽게 얘기해서 형상만 있는 것이지 실체는 없다.
나오지도 않은 뱃속의 태아다.
그래서 하는 법이 태아가 앉는 태좌법이다.
태 속에 든 어린애다.
석가불은 어린애이니 미성(未成)이다.
그러니까 결혼이 없다.
미성이 무슨 결혼을 하느냐.
어린애니 머리를 박박 깎고 앉아있다.
미륵불은 갓 쓰고 서 있는 어른이다.
어른이 된다고 하면
근본은 어린애서부터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게 진리이고 원칙이다.
처음부터 어른이 될 수는 없다.
석가불은 3천 년 운이고,
미륵불은 5만 년 운이다.
작은 것이 먼저 나오고
긴 것이 나중에 나오는 것이 순리다.
앞으로는 미륵불 운이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미륵불로 오신 것이다.
불교가 있으므로 해서
우리의 법이 나올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석가모니를 봉안한 것이다.
아무나 만들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다!
훈시(1991.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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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공사 3장 39절 참조.
북방불기와 남방불기
실제 오늘날은 성인을 계승한 현인들에 의해
전해져 오던 모든 종교(宗敎)의 맥(脈)마저 끊어지고,
도(道)는 상실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말법시대(末法時代), 말세(末世)라고 하는 것입니다.
임자(1972)년 정월 초하루 자시(子時)에
대순진리회 본부 현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2월 2일에 중앙종의회를 개최하여
종무원과 감사원의 임원을 선출하고,
2월 7일에 도헌(道憲)을 제정 반포하였습니다.
1972년은 불기 3,000년 되는 해로 불교의 운기가 다하고
미륵불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시금석입니다.
석가지운(釋迦之運) 3000년,
미륵지운(彌勒之運) 5만 년입니다.
<대순진리회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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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25년∼712년인 중통의 초회에 응하여 가르침을 편 성인은 불도佛道를 세상에 펼친 석가이다. <전교>에서는 석가의 탄생 년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釋迦如來距今二千九百五十年(癸亥年計)癸丑生
서가여래는 (계해년부터 계산했을 때) 2950년 전 계축생이다.
여기에서 계해년은 <전교>가 선포된 1923[癸亥]년을 말하므로 석가의 탄생 년도를 계산해보면 1923년 - 2950년 = -1027년 = 기원전 1028[癸丑]년이 된다.
원래 고대 인도에서는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석가 탄생 시기에 대한 사료史料도 전해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석가의 탄생 년도가 언제인가 하는 것은 처음부터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불교가 인도를 넘어 중국으로 전래되기 시작하자 중국에서는 불기佛紀를 정하기 위해서 석가의 탄생이 언제인지 찾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에는 불경에 석가가 탄생할 때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났다고 적혀있는 점에 주목하여, 중국 고전에서 그와 유사한 상서로운 일이 일어났다는 기록을 찾아 그 시기로써 석가의 탄생을 추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수隋나라의 비장방費長房은 고전 기록을 참고하여 석가의 탄생을 주周나라 장왕莊王 10년(기원전 687년)이라고 한 바 있고, 당대의 고승이었던 법상法上은 고구려의 승려가 석가의 탄생년을 질문하자 주周나라 소왕昭王 24년(기원전 1027년)이라고 답한 바 있다. 후에 법림(法琳: ?∼639?)도 <주서이기周書異記>에 주 소왕 24년 갑인년 4월 8일에 강과 못이 넘치고 궁궐과 산천이 흔들리고 밤에는 오색 빛이 태미성을 관통했다. 소왕이 소유에게 까닭을 물으니 聖人이 서방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내용이 석가의 탄생 때 나타난 현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여 법상의 주장을 계승하고, 이해 즉 소왕 24년 갑인년(기원전 1027년)을 불기 1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북방불기라고 불리는 이 불기는 고구려와 신라에 유입되어 최근까지도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남방불기를 사용하고 있다. 태국, 스리랑카, 네팔 등 남방의 불교 국가들이 1956년을 불기 2500년이라고 하여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에서 모여 제4차 WFB대회(세계불교 도우의회)를 열고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했는데,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도 이 남방불기를 받아들여 1967년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남방불기가 약 2500여 년으로 된 것은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한 아소카왕의 연대 추정에 기인한다. 석가의 탄생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 문헌이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석가가 입적하고 218년 뒤에 아소카왕이 즉위하였다는 기록은 전해지기 때문에 아소카왕의 연대를 추정하면 석가의 탄생 연대를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소카왕의 연대도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이를 대략 추산함으로써 석가의 탄생을 기원전 463년경, 기원전 564년경, 기원전 624년경, 혹은 기원전 589년∼549년 사이, 기원전 488년∼370년 사이 정도로 예측하였다. 이 중에서 석가의 탄생을 기원전 624년, 입적을 기원전 544년으로 잡고, 석가가 입적한 해로부터 기산起算한 것이 남방불기이다. 이 남방불기는 <전교>에 기록된 석가의 탄생과는 거의 500여 년의 차이가 난다.
북방불기와 남방불기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느냐를 말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남방불기를 사용한 햇수는 근래 들어서 40년이 채 되지 않았고, 불교가 전래된 200∼300년부터 최근까지 거의 1600년 이상 동안은 북방불기를 사용하여 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2년 1월에 승려인 만해 한용운이 『불교사 불교』에 기고한 글 제목이 ‘二九五八年(佛紀) 세계종교계世界宗敎界의 회고回顧’라는 점을 보면, <전교>가 선포된 1923년 즈음에도 북방불기가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방불기에서는 석가의 탄생 년도가 기원전 1027년이라고 하지만, <전교>에 따르면 실제의 석가 탄생 년도는 이보다 1년이 더 빠른 기원전 1028년임을 알 수 있다.
<상생의 길, 전교>